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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서 솁첸코 이상으로 추앙받는 축구 영웅 장문의 축구 이야기(칼럼)






올레흐 블로힌





사진이 거시기(...)한데 국내의 많은 분들은 올레흐 블로힌을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많이 아실 겁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우크라이나가 월드컵 첫 출전임에도 무려 8강이라는 호성적을 거둘 때 우크라이나의 감독이 바로 블로힌이죠.








국내에 알려진게 거의 없지만 올레그 블로힌은 무려 발롱도르 수상자입니다(1975년 수상).

디나모 키예프에서 모든 선수 생활을 보내진 않았지만 무려 19년 동안 582경기에서 266득점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디나모 키예프'가 곧 '올레흐 블로힌'이며 '올레흐 블로힌'가 곧 '디나모 키예프'라고 할 수 있죠.

매우 빠른 발을 바탕으로 쏜살같이 수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골을 넣는 것에 매우 능하여 '화살'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선수, 그냥 우크라이나의 전설이 아닙니다.

올레흐 블로힌은 소비에트 연방의 전설입니다. 그야말로 소련을 대표하던 선수였죠.

블로힌의 소속 구단이었던 디나모 키예프가 소비에트 리그를 씹어먹을 수 있었던 것은 올레흐 블로힌의 전설적인 활약상 덕분이죠.

소련 축구의 기록이란 기록은 블로힌이 쓸어담았으니까요(소련 축구 대표팀 A매치 최다 출장/득점, 소비에트 리그 통산 경기수/득점 1위, 소련 올해의 선수상 최다 수상)


소련을 대표하던 선수였으니 우크라이나의 대표 선수라고도 할 수 있겠죠?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도 자국 내에서 올해의 선수를 선정했습니다(우크라이나 축구 전문지 '우크라이니 풋볼' 주관)

올레흐 블로힌은 우크라이나 올해의 선수상을 무려 9회나 수상했습니다. 2위 안드리 솁첸코(6회 수상)에 월등히 앞서는 수상 경력이죠.

솁첸코에 비해 자국에서 주로 활동하여서 그 부분에 대해서 버프를 받은 것도 있지만(물론 이 상은 우크라이나 국내/해외 어디든 상관없이 어디서 뛰든 우크라이나 국적의 축구 선수라면 수상 요건을 갖출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올레흐 블로힌의 우크라이나 내에서의 위상은 국내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위대하죠.









그리고 올레흐 블로힌은 안드리 솁첸코에게 없는 국회의원 경력이 2번이나 있죠 ㅋㅋ

1998년에 이어 2002년에도 당선하면서 베르호브나 라다(우크라이나 의회)의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에 반해 안드리 솁첸코는 2012년 은퇴 직후 '우크라이나-전진!' 당에 입당해 10월에 비례대표로 총선에 출마하지만 당 득표율이 1.58%에 그쳐 당 득표율에 따라 당선자 수를 결정하는 비례대표제의 특징에 따라 낙선하고 말았죠 ㅠㅠ



















사견이지만 저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지는 올레흐 블로힌의 위상이 솁첸코의 그것보다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때 남미 최고의 골키퍼 장문의 축구 이야기(칼럼)





1993년 11월 7일, 크루제이루의 홈 경기장인 미네이랑(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미네이랑의 참사'가 벌어진 그 미네이랑) 브라질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에 A A조 12라운드 크루제이루 6-0 바히아 경기

훗날 세계를 호령하게 될 17세의 호나우두는 크루제이루의 6득점 중 무려 5득점을 해냈습니다.











당시 바히아의 골키퍼였던 로돌포 로드리게스는 초장부터 자기 실수로 페널티킥을 헌납하더니 급기야 마지막에 저런 어이없는 실수로 호나우두의 5골을 완성시켜주었습니다.

아마 너무나도 많은 골을, 그것도 한 선수한테 미친듯이 퍼주다 보니까 멘탈이 무너져 버렸나 봅니다.











뿐만 아니라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한 때 최다 출전 기록(78경기, 현재는 디에고 포를란의 112경기)를 가지고 있었고 1980년 문디알리토(FIFA 월드컵 50주년 기념으로 한 대회이며 월드컵 우승국 6개국이 모여서 한 대회) 우승, 1983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함께하며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큰 족적을 세웠습니다.













나시오날 시절만큼의 최전성기 포스를 자랑하진 못했지만 그 못지 않았던 산투스 시절(1984~1988년)에는 레이나 뺨칠 수준의 엄청난 5단 선방을 해낸 적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큰 신장(191cm)임에도 굉장히 민첩한 움직임을 자랑했던 그런 선수였습니다.












아무튼 산투스 시절에도 매우 놀라운 활약상을 선보여 4년만 뛰었음에도 아직도 산투스 팬들 사이에서 '전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산투스 구단에서 2010년 공로상을 그에게 수여하면서 그가 4년 간 얼마나 좋은 활약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나시오날과 산투스 시절 이후에는 급격히 폼이 하락해서 호나우두에게 어이없이 볼을 뺏기는 등의 실수도 저지르긴 했지만 실력과 업적으로 보면 분명히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남미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FC 서울의 부드러운 엔진' 고명진 K리그



※ 이 글은 2014년 3월 15일에 작성했습니다.







한글이름: 고명진
영문이름: Koh Myungjin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88년 1월 9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왼쪽 미드필더
키: 185cm
몸무게: 77kg
소속팀: FC 서울


일대기(Biography)

고명진의 2004년 석관중학교를 중퇴하고 FC 서울의 입단하면서 만 16세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프로에 데뷔한다. 당시 FC 서울의 조광래 감독이 FC 서울의 전신인 안양 LG의 감독을 맡던 시절부터 이청용, 고요한, 송진형, 김동석, 안상현 등 유소년 축구 유망주들을 조기에 프로로 전향시켜 육성시켰는데 고명진도 이 사례 중 한 명이다. 석관중학교에 한창 재학하고 있던 2002년부터 안양 LG가 숱한 관심을 드러냈고 결국 FC 서울에 입단하게 되면서 프로 축구계에 발을 들인다.

FIFA 월드컵 독일이 개최됐던 2006년에는 월드컵 기간에 삼성 하우젠컵 2006(리그컵)을 진행했는데 이장수 감독이 이끌던 FC 서울이 삼성 하우젠컵에서 우승하였다. 그러나 이 우승은 FIFA 월드컵에 출전하는 박주영, 백지훈 등 기존의 주전 선수들보다 고명진을 포함해 한동원, 천제훈, 심우연, 김동석 등 서울이 안양 LG 시절부터 장기적으로 진행하던 유망주 육성 사업의 수혜를 받은 선수들이 주축을 이뤄서 일궈낸 우승이라 더욱 값졌다.

고명진은 이후 한동안 잊혀진 선수가 되고 만다. 셰놀 귀네슈 감독이 부임한 2007년부터 이청용, 기성용이 맹위를 떨치며 국가대표 선수로 성장하는 동안 그들과 또래인 고명진은 계속되는 잔부상과 슬럼프에 빠져 주전 경쟁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그대로 한 물간 유망주가 되나 싶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자 고명진에게 다시 기회가 돌아오게 된다. 고명진은 이전과는 다른 과감한 플레이로 최용수 당시 감독대행(현재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고명진을 매우 중용했다. 고명진은 그에 보답하듯이 미드필드에서 유연한 전개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2011년 초반 황보관 감독이 좋지 못한 성적으로 사임한 뒤 그것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던 최용수 감독대행이 바람대로 남은 시즌을 잘 추스렀던 FC 서울의 2011년은 '고명진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공헌을 했고 공격 포인트(2득점 7도움)도 그 공헌을 대변하고 있다. 경기를 뛰진 못했지만 이 시기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처음 소집됐다는 것은 그만큼 선수의 능력이 '일취월장'했다는 증거이다.

다음해인 2012년에는 하대성과 찰떡 호흡을 과시하며 전년도보다 더욱 안정된 플레이로 FC 서울이 K리그를 우승하는 데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었고 2013년도 마찬가지로 공격 포인트는 전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수행해야 할 본연의 억할을 맡는 것에 점점 눈을 뜨면서 더 좋은 선수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선수 분석(Player Analysis)

'왼발잡이 테크니션'이라는 희소성을 가졌고 볼을 다루는 기술이 정말 탁월한 선수이다. 땅볼 전진 패스를 상당히 잘 구사하고 동료의 특성에 맞춰주는 수동적인 움직임도 좋은데 지난 시즌까지 FC 서울에서 활약한 데얀과 특히 호흡이 좋았던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장점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진'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매우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전진 패스와 전진 드리블링은 K리그 클래식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이 같은 전진 능력은 공수 전환이 수시로 일어나고 공간이 많이 노출되는 K리그 클래식의 특성 상 전진 능력은 선수에게 확실한 이점이 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고명진은 전술적인 부분에서 역습으로 전환하는 시발점 역할을 아주 잘 해주고 있다.

기동성이 정말 좋으며 앞쪽으로 볼을 운반하면서 전방의 공격수들과 볼을 주고 받고 측면으로 빠지면서 뒤쪽에서 들어오는 선수에게 다시 내주는 장면은 고명진의 기동성을 대변하는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왼쪽 풀백의 공격력이 눈에 띄지 않아서 중앙 미드필더의 측면 지원이 더욱 필요하던 2011년, 2012년의 FC 서울의 전술에서 그런 모습을 더 많이 연출하려고 노력했다.

수비적으로는 사실 큰 장점이 없고 단점이 부각되고 있는 수준이다. 2011년 본격적으로 FC 서울의 주전 중앙 미드필더로서 발돋움한 이후 이전의 소위 볼을 예쁘게 차려 했던 이전의 고명진에서 벗어나 자신의 장점인 기동성을 좀 더 이용해 넓은 활동 반경을 보여줬지만 아직까지 미흡한 편이다. 이전에는 4-3-3 시스템의 '3'에서 뛰면서 하대성, 한태유(또는 최현태) 2명의 중앙 미드필더에게 지원을 받았으나 2013년 FC 서울은 윤일록을 영입해 2선 선수들의 움직임을 대폭 보완하여 2선에서의 좀 더 빠른 공격을 시도하게 되면서 4-2-3-1 시스템의 '2'에서 주로 뛰게 됐는데 이전에 2명의 중앙 미드필더가 아닌 단 한 명(하대성)의 지원만 받게 되면서 수세적 상황에서 고명진이 노출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전진'이 결국 막힐 경우 문제점이 드러난다. 전진이라는 것이 자신의 본래 위치를 벗어나 앞쪽으로 간다는 것인데 이 경우 본래 위치가 상대에게 허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공간의 허용을 막는 것이 더욱 중요한 위치인 Back-4 라인 앞쪽은 상대의 공격이 이뤄지는 주요한 위치이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막히게 되면 상대가 비어 있는 공간을 이용해 빠른 역습이 가능하다. 2013년 K리그 클래식에서 FC 서울의 실점이 전년도에 대폭 늘어난 이유는 이 같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수비 가담이 많아지면서 자연히 상대 선수와의 경합도 많이 일어났는데 마치 태클 실력이 부족한데 무리한 태클을 자주 시도하면서 쓸모 없는 레드 카드를 종종 받았던 폴 스콜스를 연상시키는 미흡한 수비 기술도 약점으로 꼽힌다. 그렇다고 폴 스콜스처럼 아주 위험한 태클을 시도하지는 않으나 경고를 의외로 자주 받고 상대의 득점이 잘 나오는 위험 지역에서 파울을 자주 범하기 때문이다.

이는 위에서 설명한 '전진'이 막힐 경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전진이 막히면서 상대에게 역습을 허용하면 그걸 막으려는 고명진은 뒤에서 쫓아오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되면 대체적으로 뒤를 노리는 태클이 상대 선수에게 가해지기 마련이고 상대의 뒤를 노리는 파울은 명백한 '옐로우 카드' 감이 맞기 때문이다. 고명진은 이렇게 전진이 막힐 경우 이러한 파울을 자주 범했다.

2014년에는 '영혼의 파트너'였던 하대성이 베이징 궈안으로 이적하고 강승조가 경남 FC에서 FC 서울로 이적했기 때문에 미드필드에서의 조화를 새롭게 맞춰봐야 한다. 고명진은 하대성의 조력을 매우 많이 받았는데 새롭게 이적한 강승조는 하대성의 플레이 스타일과 흡사하다(그러나 강승조가 경남 FC에서는 볼을 후방에서 뿌리긴 하나 후방에서의 플레이에 주력하기보다 종적으로 움직이는 활기 넘치는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하대성이 대구, 전북에서 활약하던 시절의 플레이 유형과 특히 더 흡사하다). 강승조는 고명진 본연의 활약을 계속 보여줄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좋은 선수이기 때문에 고명진 개인뿐만 아니라 고명진과 강승조 간의 조화도 계속해서 지켜봐야 한다.

호나우두의 위엄을 알게 됐던 경기 축구 잡담




아마 2007년 10월인가 11월이었을 겁니다.

호나우두는 2007년 1월 레알 마드리드에서 AC 밀란으로 이적하여 14경기 7득점을 하여 '퇴물'이라는 오명을 벗는 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다음 시즌인 2007-08 시즌에 대한 기대도 상당히 컸으나 개막 직전 허벅지에 이상이 생겼고 생각보다 부상 기간이 길어져 결국 약 3-4개월 간의 재활을 거쳐 2007년 10월(또는 11월)에 복귀합니다.

복귀전은 아마 리보르노였나 칼리아리였나 아무튼 약 5-6개월 만에 선발 출전했습니다.

이 날 호나우두는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득점도 못했는데 호나우두의 위엄을 알 수 있었다고?'라고 의문을 제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호나우두의 위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경기 내적인 내용과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2007-08 시즌 당시 세리에 A의 대한민국 중계는 KBS N 스포츠가 담당했습니다.

호나우두의 복귀전이 있던 그 날 밤 우연히 KBS N 스포츠로 채널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스코어보드 상단에 '호나우두 복귀전'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대한민국 선수의 출전 같은 경우(예: 박지성 선발 출전)이 아니라면 스코어보드 상단에 예를 들어 '2007-08 세리에 A 16R' 이런 식으로만 표현을 했을 텐데 국내 선수도 아닌 해외 축구 선수들만 즐비한 경기에 호나우두가 부상에서 복귀했다며 '호나우두 복귀전'이라고 따로 쓴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신기했고 놀랐습니다.


그의 위엄을 알 수 있는 경기는 수두룩하지만 당시 호나우두에 대해 사실 큰 감흥이 없었던 저에게는 이 경기가 호나우두에 대한 생각에 상당한 변화를 주었습니다.

권창훈에 대한 평가 K리그

※ 이 글은 2015년 8월 4일에 작성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권창훈은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를 가장 선호합니다. 그렇지만 같은 자리에 산토스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공격형 미드필더보다 중앙 미드필더에서 좀 더 많이 활약하는데요.

하지만 볼 공급에 아주 능한 선수는 아니죠. 패스 실수도 여타 중앙 미드필더에 비해 조금 많은 편이구요.

2014년 전반기까지는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급해보인다', '약간 허둥지둥한다'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안정감을 찾고 좌우 측면으로 넓게 벌리면서 경기의 템포를 조절하는 데에도 눈을 뜨면서 맹활약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김두현을 대신해 종종 중원의 빌드업 리더 역할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수원이 김두현과 재계약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높은 몸값이 주된 이유지만 권창훈이 중앙 미드필더의 자리에서도 안정감을 찾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권창훈은 중원에서 정적으로 볼 공급을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침투하면서 전방에서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수원에서 같이 활약하고 있는 이상호의 어린 시절 모습과 비슷한 면이 있죠.

때문에 중앙 미드필더보다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더 좋은 능력을 발휘하죠. 2014년까지 수원에 김두현이 있을 때는 권창훈이 굳이 중앙 미드필더에서 볼 공급을 맡을 필요는 없기 때문에 오히려 산토스를 대신해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뛸 때는 좀 더 활기찬 느낌은 있었습니다(활약상을 떠나서).

그 대표적인 경기가 작년 8월 3일 포항을 4-1로 대파했던 경기입니다. 산토스와 교체 투입되면서 포항의 수비진을 정말 마음대로 유린하면서 23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1득점 1도움을 했습니다.



청대 시절에도 2012년 AFC U-19 대회에서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에 문창진(포항)이라는 엄청난 재능이 있어서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습니다. 문창진 역시 지금 수원의 산토스처럼 사실상 공격수로 움직여서 권창훈이 김선우(제주)와 더불어 볼 공급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움직였는데 권창훈이 가진 재능에 비해 조금 묶여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2013년 FIFA U-20 월드컵에서는 문창진이 부상으로 제외되며 류승우와 번갈아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는데 자신의 후방에 볼 공급을 능하게 해줄 수 있는 이창민(전남)이 합류하면서 좀 더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류승우에 비해 활약상이 밀렸긴 하지만...).




올 시즌 수원에서 권창훈과 같이 중원을 구성하고 있는 산토스와 조성진은 빌드업에 거의 관여를 하지 않거나(산토스: 거의 공격수처럼 기능함) 빌드업에 능하지 않아서(조성진: 김은선을 대신해 4-1-4-1 시스템에서 '1'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담당하고 있는데 김은선에 비해 공격 전개 능력이 현저히 떨어짐) 권창훈이 빌드업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수원에서는 염기훈과 홍철이 후방에서 전방으로 직접 몰고 올라갈 수 있지만 중원으로 직접 파고드는 경우는 적어서 권창훈은 상대적으로 중원에서의 볼 공급에 좀 더 목적을 두고 움직입니다.



EAFF 동아시안컵에 참가하고 있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이재성이라는 빌드업 리더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원래 장점을 보여 줄 기회는 지금이라고 생각되네요.

혹자는 권창훈은 드리블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걱정이라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이 권창훈의 원래 장점 중 하나입니다. 오히려 수원에서 그것을 표출할 기회가 적어서 아쉬웠는데 지난 중국 전에서 아주 당차게 드리블을 시도하니까 정말 활력이 넘치더라구요. 제가 권창훈에게서 보고 싶었던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이재성의 포지션이 대표팀에서는 주로 오른쪽 공격형 미드필더긴 하지만 중원으로의 가담을 굉장히 많이 하고 그에 따른 스위칭도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동료와의 스위칭을 즐기는 권창훈의 입장에서 이재성은 경쟁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좋은 파트너를 만났다고 생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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